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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December, 2022

성탄 대축일 미사

  다시 한번 성탄 인사드립니다 . 성탄의 축복이 모든 교우에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특별히 우리 본당에 아픈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아픈 분들에게 치유의 은총으로 다신 건강한 몸과 마음이 되어 주님의 제단에서 다시 만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 어젯밤 미사의 복음은 마태오 복음 1 장 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는 첫 장으로 시작하였습니다 .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진정한 인간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성탄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 인간이 되신 사건이 사람들의 눈속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그러한 믿음과 확신을 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족보를 복음서 첫 장에 기록한 것입니다 .   성탄 낮 미사의 복음은 공관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 . 공관 복음의 공통적인 관점인 인간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철학적이며 그중에서도 형이상학 ( 形而上學 ) 차원에서 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 “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말씀입니다 ,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비유하였습니다 .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묘사합니다 . 그 말씀은 태초부터 존재하였고 지금은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합니다 .   성서학적으로 보면 요한복음은 세 개의 공관 복음보다는 제일 늦게 쓰였습니다 (100 년경 ). 요한이 복음서를 서술할 때의 배경과 공관 복음의 저자들이 복음서를 서술할 때와는 시대적 배경이 안전히 달랐습니다 . 요한이 복음서를 서술할 때는 영지주의 ( 靈知主義 , Gnosis) 라는 사조가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 영지주의는 100 년경 아직 어린 그리스도교 교회를 괴롭히는 가장 큰 위험이었습니다 . 영지주의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교적인 현상이었습니다 .

성탄 밤 미사 강론

  볼티모 한국 순교자 성당의 모든 교우에게 성탄 인사 드립니다 .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교우들 각자에게 필요한 은총과 축복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 건강이 좋지 못한 교우들에게는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건강을 주시기를 기도하며 , 교우들 가정에 화목과 평화와 행복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사업을 하시는 분들에게는 그 사업에 강복해 주시를 청하며 , 어르신들에게는 건강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이 밤 온 세계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거룩하게 보내는 사람도 있고 ,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마저 흥청망청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가난하고 소박하게 세상에 오심에 무릎을 꿇고 그저 하느님을 찬양할 뿐입니다 . 부디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심으로써 모든 창조물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시기를 간청할 뿐입니다 . 세계 1 차 대전이 한창일 때 , 성탄을 하루 앞둔 24 일에 영국 , 독일 , 오스트리아 , 러시아의 군지휘관들은 모여서 성탄 하루만은 휴전하자고 제안하여 25 일은 하루 쉬었다고 합니다 . 1914 년에 성탄절을 맞이하여 그렇게 치열하게 전투하던 군인들은 하루를 휴전하면서 성탄절 기념 독일과 영국이 축구를 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 모두가 이 성탄절 기념 축구 경기로 전쟁이  멈추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꿈일 뿐이었고 그다음 날부터는 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계속하였다고 합니다 .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탄생일이 서로에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기에 짧지만 평안한 하루의 휴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   오늘 이 밤 , 주님께서 삶의 고달픔에 지친 우리 모두에게 편안함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 편안함으로 또다시 시작할 수 있는 희망과 힘과 지혜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이 밤 예수님 탄생의 축복이 모든 교우에게 평안함과 희망과 행복을 주시기를 기도합

대림 제4주일 강론

  대림 제 4 주일입니다 . 2022 년도 이제 2 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 한해를 보내면서 우리 각자가 느끼는 소회 ( 素懷 ) 가 다를 것입니다 . 이제 서서히 마무리를 하시면서 상처와 아픔을 털어버릴 준비를 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중의 하나는 털어버릴 것을 과감하게 털어버리는 못하고 내년으로 가져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시는 전대미문 ( 前代未聞 ) 의 사건 앞에서 , 우리는 우리의 묵은 좋지 못한 감정을 털어버리고 그분의 가난하고 초라한 구유 앞에 무릎을 꿇을 준비를 하면 좋겠습니다 .   오늘 대림 4 주일의 복음에서 우리는 요셉을 만납니다 . 요셉은 예수님의 양아버지입니다 . 성경에는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 그러나 하느님은 요셉을 통하여 예수님을 인간 관습의 굴레에 들어오게 합니다 . 전능하신 하느님이시기에 다른 방법으로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실 수 있었겠지만 , 하느님은 인간의 관습과 제도의 굴레 안으로 보내셨습니다 .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부모를 두고 있습니다 .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 그러기에 예수님 또한 부모가 있습니다 . 아버지는 요셉이고 어머니는 마리임을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알고 있습니다 . 오늘은 요셉과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서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   지난 12 월 8 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지냈습니다 . 이 대축일은 성모님께서 어머니 안나의 태중에서부터 하느님께 봉헌됨을 뜻하며 , 그 봉헌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로 마리아 만큼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원죄에 물들지 않게 배려하셨습니다 . 마리아에게는 이렇게 큰 은총을 주셨지만 , 요셉에게는 크게 중요한 은총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 그러나 요셉에게도 너무나 큰 은총이 있습니다 . 그것은 다름 아닌 혈통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 요셉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 다윗 가문 ( 家門 ) 의

대림 제3주일

  벌서 12 월도 중순으로 들어왔습니다 . 대림 3 주일을 지내고 대림환에는 분홍색 초에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 이제 성탄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신문에 독감으로 입원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였습니다 .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   저는 아직도 해리스버그 한인 성당에 미사를 가고 있습니다 . 주임 신부님께서 아직도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입국을 못 하는 실정입니다 . 많은 교우분이 걱정해 주시지만 저는 기쁜 마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 어느 날 묵상 중에 최양업 신부님이 생각났습니다 . 아시는 것처럼 최양업 신부님은 한국의 첫 신부님이신 김대건 신부님과 동기생으로 두 번째 신부님입니다 . 김대건 신부님이 신품을 받으시고 조선 땅에 입국하시고 1 년 반 만에 체포되어 순교하셨다면 , 최양업 신부님은 조선에 입국한 후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순방을 하였는데 1850 년부터 1861 년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숨어지내다 베르뇌 (S.F. Berneux) 주교님에게 사목활동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던 중 문경에 있는 교우촌에서 과로로 사망하였다 . 최양업 신부님은 하루에 300 리 길을 걸어 교우들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 그런 최양업 신부님을 생각하면 제가 해리스버그 가는 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   대림 3 주일의 복음에서 우리는 지난 주일처럼 또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 오늘 복음은 지난 주와는 다르게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면서 의외의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 “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 지난주 복음에서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해서 너무나 확신에 찬 선포를 사람들에게 하였습니다 . “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날 자격조차 없다 .”

대림 제2주일 강론

  12 월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 어느덧 2022 년의 마지막 달입니다 .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세월이 무척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 누군가가 인생의 속도는 나이에 비례한다고 하였습니다 . 20 대는 20 마일로 가고 30 대는 30 마일로 가고 70 대는 70 마일로 간다는 뜻입니다 . 정말로 그렇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 한달 채 남지 않은 2022 년 오시는 주님을 만나면서 마무리 잘 하시면 좋겠습니다 .   대림 제 2 주일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과 거의 동기생으로서 , 우리가 잘 아는 엘리사벳의 아들입니다 . 그런 세례자 요한이 느닷없이 광야에서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 회개하여라 .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 하고 외칩니다 . 그 외침이 얼마나 크고 , 그 목소리에 권위와 힘이 있었던지 “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 라고 전합니다 . 나아가서 요한의 외침이 가슴에 파고 들었으면 , 심지어 “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 왔다고 전합니다 . 도대체 요한의 말에 어떤 힘과 권위가 있었기에 그 자존심 강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왔을까요 ? 요한의 외침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는 진심으로 하느님의 심판이 가까웠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그 외침이 사람들 눈과 귀에는 진정한 메시아의 외침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요한의 외침은 직접적이고 긴박한 하느님 심판의 선포였습니다 . 따라서 다급해진 사람들은 삶의 변화와 하느님의 용서를 위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 요한에게 온 사람들과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은 정확하게 분별 (Distinguishment) 과 식별 (Discernment) 을 잘하였던 것입니다 . 비록 이 두 집단의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의롭고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집단 체면 안에서 살아왔지만 , 요한의 외침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