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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February, 2022

연중 제8주일 강론

  날씨가 가는 겨울을 아쉬워하는지 변덕을 너무 많이 부리고 있습니다 . 일교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몸 관리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 지난 목요일에는 메리랜드 주 의회에 가서 의원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왔습니다 . 종파와 관계없이 하루씩 초대하여 회의 전에 기도하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   오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 오늘은 특별히 우리 자신의 위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 ‘ 위선 ’ 이라는 신약성서의 단어는 ὑ πόκρισις ( 유포크리시스 ) 로써 ‘ 설명하다 , 드물게는 대답하다 ’ 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 위선자 (ὑ ποκριτής )’ 라는 용어를 가끔 사용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을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 루까 복음 12 장 54 절에서는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하는 군중들을 보고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으며 , 같은 복음 13 장 15~16 절에서는 자기모순에 빠진 회당장과 그 주위 사람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 오늘 복음과 동일한 내용이 나오는 마태오 복음 7 장 3 절에서도 자기모순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주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 위선자라고 질타를 많이 하셨습니다 . 예수님께서 위선자라고 질타하신 부류들의 공통점은 다름 아닌 자기모순 (Self-Contradiction) 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 이들은 인식과 실천에 있어서 삶이 다른 사람들이었고 , 심지어 자기모순을 남에게까지 강요하기도 하였습니다 ( 마태 23, 13).   ‘ 위선 ( 僞善 / hypocrisy)’ 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 거짓된 선 ' 을 뜻합니다 . 쉽게 말하자면 착한 척 . 하얀 거짓말과는 다른 개념으로 , 하얀 거짓말은 타인에 대한 선의라도 있지만 위선은 그저 자신의 이기심일 뿐입니다 .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감추고 겉으로는 선한 행위를 보여주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것 . 누군가를

연중 제7주일

  금요일 새벽부터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서 아침에 일어나니 사제관에 전기가 나갔습니다 . 다행히 성당에는 전기가 나가지 않아서 아침 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 사제관에는 오후까지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 다행히 토요일 아침에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면서 이해가 잘되지 않았습니다 .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   오늘 연중 7 주일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 지난주 복음이 루까 복음 6 장 17 절에 시작하는 평지설교의 말씀이었습니다 . 역설적인 행복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 오늘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 마태오 복음 5 장과 7 장이 말씀과 비슷합니다 .   오늘의 말씀은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고 우리가 실천하기가 좀 껄끄러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 일명 명령적인 말씀입니다 (with a series of imperative). “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 오늘 이 복음 말씀을 누가 듣고 있습니다 . 그 옛날 예수님 시대에 , 예수님 앞에 있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입니까 ? 오늘 이 자리에서 듣고 있는 바로 우리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 성서말씀을 우리는 흔히 살아있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 왜 살아있는 말씀 (living words) 이라는 뜻은 단순히 과거에 기록된 글이 아니라 , 오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직결되는 말씀이기에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 오늘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 그러기에 우리는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 믿음을 갖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 우리는 매 순간 결단의 삶을 살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하는 것입니다 . 그러기에 신앙이 약하든 강하든 밋밋하든 관계없이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   우리가 방금 들은 복음 말씀에 크게 동요되지 않는다면

연중 제6주일 강론

  지난주는 정말로 따뜻한 봄날이 며칠 있었습니다 . 봄이 왔나 싶다가도 며칠 온도가 내려가면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 어느 한국 시인의 말처럼 우수와 경칩이 아직 멀었기에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번 19 일 토요일이 우수 ( 雨水 ) 입니다 . 입춘과 경칩 중간에 있는 절기로 봄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 아무리 바빠도 심심풀이로 절기들을 좀 알고 살면 우리 몸 안의 생체 리듬이 더욱 활발하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 .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최대 궁극목적을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 아마도 모든분들이 어렴풋이 동의하리라 생각됩니다 . 과연 행복이 무엇입니까 ? 이 자리에서 각자 그 정의를 한번 내려보시기를 바랍니다 . 정답도 없고 틀린 답도 없는 물음입니다 . 자기만의 행복을 성취하고 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예수님은 오늘 참된행복 (Beatitude) 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진복팔단 ( 眞福八段 ) 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 오늘 루까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행복 ( μακαρισμός , 마카리스모스 ) 은 축복과도 같은 말입니다 .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이 용어는 오직 하느님 나라의 참여를 통해서 오는 결정적인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세속적인 행복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이 행복은 사람에게 적용되며 뒤따라 나오는 내용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 이러한 행복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 신약성경에서의 행복은 엄청난 정서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 또한 종종 거짓 행복과는 반대가 되며 , 하느님 나라의 최우선의 좋은 것이 일차적이라면 모든 세속적인 가치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그렇다면 , 오늘 복음의 행복선언과 마태오 복음의 행복선언은 거룩한 역설 (sacred paradoxes) 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가치들 전환에 영향을 주고 계십니다 . 예를 들면 , 오늘 복음에서

연주 제5주일 강론

  입춘 ( 立春 ) 이 지났습니다 . 대한 ( 大寒 ) 이 24 절기 중에 마지막이라면 , 금요일에 지난 입춘은 24 절기 중에 첫 절기라고 합니다 . 빨리 봄이 오고 코로나 펜데믹도 오는 봄과 함께 끝이 났으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 곧 좋은 날이 오리라 생각됩니다 .   오늘 연중 제 5 주일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계속됩니다 . 지난주에 예수님은 당신이 살았던 동네 회당에서 가르셨다가 , 동네 사람들의 반대로 거의 쫓겨나다시피 해서 회당에서 나오셨습니다 . 그들의 완고한 마음 , 예수님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감정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나오셨습니다 . 그러나 그분의 사명 , 즉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계속됩니다 .   오늘 복음은 “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 라고 전합니다 . 그분의 가르침은 계속되고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는 계속 이어집니다 . 오늘 복음에서 특이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고유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협조자들을 부르십니다 .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협조를 요청하십니다 . 그래서 드디어 예수님과 일생을 동고동락 ( 同苦同樂 , sharing one’s sorrows and joys) 할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 마르코나 마태오 복음과 비슷하지만 , 루카 복음은 좀 더 역동적으로 몇몇 제자를 부르십니다 . 베드로와 그의 동업자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 그들은 직접 예수님의 부탁 말씀에 순순히 따름으로써 그분의 진가 ( 眞假 ) 를 확인합니다 . 그 진가를 확인한 후 베드로는 정말로 겸손의 말을 합니다 . “ 주님 ,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 이 베드로의 고백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 다름이 아니라 ,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권능과 현존을 체험하였습니다 . 어찌 보면 ,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습니다 . “ 스승님 (master),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