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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September, 2020

추석 합동 위령 미사(9월 27일)

  오늘은 연중 26주일 이지만 본당에서는 관례대로 추석 합동 위령미사를 지냅니다. 비록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미국이라는 나라로 이민을 와서 살지만 한국의 한가위 명절을 통해 우리 보다 먼저 가신 조상님들께 예를 갖추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합동 위령 미사를 통해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축복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추석 명절은 오래된 한국의 전통적인 명절입니다. 세계 각 나라는 우리와 같이 추수감사절이 다 있습니다. 1년동안 재배한 농작물들을 수확하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가족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전통은 제례형식이나 양식은 달라도 그 의미는 모두가 같은 것이라 봅니다. 미국은 잘 아시는 것 처럼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내고 있으며, 이 또한 우리나라의 추석과 같은 의미라고 봅니다. 결국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는 명절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조상님께도 감사드리고 그 감사의 행위는 결국 가족과 이웃과의 나눔드러날 때 더욱 의미가 깊다고 생각됩니다.  지난 주 한국순교자 대축일 강론에서 잠깐 언급하였습니다. 제사 논쟁으로 인하여 조선 천주교회에 엄청난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유교의 제사에 대한 정의는 조상신에 대한 숭배였습니다. 그러나 그 유교의 제사를 다른 각도로 본다면 이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의 은덕에 대한 후손들의 각별한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반응이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예를 갖추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은 조상들께 예를 갖추고 난 후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은 현세를 살고 있는 모든 후손들 입니다.  제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조상들께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차려진 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에서는 이 제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를 다니지 않는 형제들과 집안 제사 

성김대건 안드레아와 성정하상 바오로와 동교순교자 대축인(9월20일)

  9월 20일 성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  오늘은 잘 아시는 것 처럼 우리 본당의 주보축일이신 한국의 순교자들 대축일 입니다. 모든 분들이 잘 알고계신다고 생각합니다만 한국 초기 교회사를 언급하겠습니다. 1784년 이승훈이라는 분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한국천주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이라는 분이 어떻게해서 세례를 받게 된 경위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780년 대에 조선의 남인 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여온 책들을 모이서 공부하던 중에 천주교관련 책들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공부를 하게되었습니다. 몇명의 남인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신자되는 방법도 알게되었습니다. 그래서 1784년 청나라 황제에게 곡물을 바치러가는 일행(동지사, 겨울에 가는 사신일행의 이름)중 통역관인 이승훈에게 북경가서 세례를 받아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승훈이 북경(南堂聖堂)에서 세례를 받아 오면서 한국의 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천주교 교리는 유교정신이 지배하는 조선에서는 너무나 획기적인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입교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천주학에서 가르치는 교리가 유교교리와는 반대되는 것이 많기에 조선 정부에서도 주의갖고 지켜보게 되었습니다(남녀평등, 제사문제). 그러던중 전라도 내포에서 윤지충이라는 분이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관습에 따라 지방을 쓰지않고 그냥 장례를 치르는 일이 일어나면서 조선천주교회의 피비린내나는 박해는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의 초기교회사는 순교사라고 할 정도로 가혹한 박해를 받았고, 이에 따른 많은 순교자들이 나옵니다. 자세히 연구해보면 조선 정부의 관리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천주교인들을 정치적으로 교묘히 이용하여 박해를 일으킨 일이 많습니다.   이 가운데 4대박해라고 부르는 박해가 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를 말합

연중 24주일 강론

  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줍니다. 가을 바람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좋은 기운도 받으시고 마음에 묻고 있는 미움과 섭섭함, 분노들을 날려보내시면 좋겠습니다.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은 우리 영혼을 싱거럽고 신선하게 해 줍니다. 가을의 좋은 바람 많이 맞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인간 생활 안에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의 용서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십니다. 그 대답은 한계없이 할 수 있는대로 많이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로 어려운 지시이기도 합니다. 쉽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단 조건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 말입니다. 제3자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이해가 가고 수긍도 하고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 자신과 관련될 경우에는 이전까지 이해해 왔고 수긍해 왔던 것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오직 나 자신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이해 합니다. 그래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고 그냥 너그럽게 넘어갈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용서'는 신약성서 원문에는 aphienai라고 하고 그 명사형은 aphesis라고 합니다. 용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항상 하느님에 관한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언제나 다른 사람을 용서할 준비를 해야하고 요구가 있을 경우에는 용서 해야됨을 의미합니다. 이 용서의 기본은 예수님의 구원 행위이며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많은 용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어찌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유에서 말씀하신 두 빚진 종의 비유에서 첫번째 종은 용서받았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무자비한 종에 해당 될수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용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부끄러움없이 용서를 빌지만 나에게 잘못한 상대방에게는 용서를 베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용서는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이고 용서를 했다고는 하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미움이 항상 

연중 23주일 강론

 9월의 첫 주일입니다. 9월 한달도 우리 본당의 모든 교우분들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는 덥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함을 느낍니다. 햇살이 좋은 날은 밖에 나가셔서 가을 햇빛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관계를 맺고 산다고 얼마전 강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Human Being are social animals)'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은 관계적 존재라는 말과 같습니다. 관계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공동체성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안되는 존재이고 공동체를 떠나서는 살수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을 돌이켜 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관계를 맺고 어느 공동체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사람마다 관계의 성질이 다를 수 있고 공동체의 성격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관계적 동물이고 공동체에 속한 존재임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에 인간이 전통적으로 관계를 맺는 방식과 똑같은 모습으로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셨고 가정이라는 공동체 안에 오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관계를 맺고 사는 존재임을 인정하시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관계를 맺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교우분들은 지금 주위의 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살고 계십니까? 아마도 우리 본당의 교우분들은 모두가 좋은 관계 속에 사신다고 생각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100% 만족스러운 관계형성이 불가능하기에 서로간에 갈등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갈등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관계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 자식간의 갈등, 형제간의 갈등, 친구간의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