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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August, 2020

연중 22주일 강론

 세상에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조형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고 친숙한 조형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우리 한국사람들에게는 십자가 일것입니다. 한때 한국에서는 전국에 있는 커피숍보다 교회가 더 많다는 통계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은 동네 구석 구석에 십자가가 달려있고, 밤이되면 그 십자가에 불이 들어옵니다. 그 많은 십자가 그것은 곧 교회를 표시합니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관계없이 십자가 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 입니다. 미국은 한국과 또 다르게 다양한 종파들이 있어 십자가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십자가가 그렇게 많이 있는데 세상은 왜 이렇게 갈수록 삶이 힘든 것일까요? 지구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들이 제일 많다고 하는데 세상은 온통 전쟁과 폭력과 인종간의 갈등, 세대간의 갈등,,,,으로 점점 더 삶이 힘들고 어려워 지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어떻게하면 코로나를 빨리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모두 잘 알고 있는데.....왜 일치하지 못하여 갈수록 더 기승을 부리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오늘날 현실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십자가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기 원하실까요?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당신을 따름이 결코 쉬운일이 아님을 넌저시 암시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구에게나 십자가가 주어집니다.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나면서 자신을 억누르는 즉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십자가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형에 사형선고가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큰 대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형은 로마제국 시대에 있었던 사형제도 입니다. 십자가형 

연중 21주일 강론

   교우 여러분들께서는 누구로부터 진심어린 고백을 들어보신 적이 있겠지요? 아마도 지금 같이 부부의 연을 맺고 사시는 배우자에게 들어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강론 원고를 보시는 분들은 그 옛날 배우자께서 사랑고백하시던 때를 한번 떠 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때의 심정이 어떻했는지 떠 올려보세요. 지금은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 감흥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분은 심장이 쿵쿵 거리는 분도 계실것 입니다. 누구로부터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는 것은 나이에 관계없이 각자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우리 안에 엔톨핀을 마구 돌게합니다. 기분좋은 현상입니다.   또한 굳이 사랑고백이 아니라도 상대방으로부터 진심어린 고백을 듣는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관계에 있어서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좋은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 될수 있습니다. 소원하고 서먹서먹한 관계였다면 그 고백을 통해서 그동안 쌓였던 오래를 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앞으로 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많이 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더 나은 관계를 위해서 누구든지 상관없이 서로 마음을 고백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예수님 정체성에 대해서 진정한 고백을 듣습니다. 세간의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누구라고 하더냐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고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의 예수님 정체성에 대해서 듣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 물음에 베드로 사도가 당당하게 나서서 고백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듣고 그를 축복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의 주춧돌임로 명시하시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십니다. 오늘날 교황제도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께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그분의 은총을 청합니다. 아마도 그 고백은 우리 자신의 진정성이 담겨있는 우리 

연중 20주일 강론

   8월도 어느덧 중순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늦여름이고 곧 가을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우분들께서는 어제 몇분의 사람을 만나셨나요?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신 분도 계실 것이고 그냥 일상처럼 가족들이나 평소 잘 알고 계시는 친구분들을 만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갑니다. 가족, 친구, 처음 보는 사람, 매일 매일 업무로 만나는 사람....등. 친구(親口)라는 말은 입을 맞춘다는 말입니다. 입을 맞춘다는 말은 그만큼 신뢰하고 사랑하고 서로 동경하는 사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친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그 친구에게 진정성(眞情性, sincereness)을 느끼기 때문에 친하다고 할 것입니다. 누구나 사람을 대할 때 이 진정성을 보이면 쉽게 친구가 될 수 있고 그 친구에게 믿음을주고 나의 마음을 줄수 있습니다. 이민 오셔서 얼마나 많은 친구를 사귀셨나요. 모든 분들이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 진정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삶의 가장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성애가 강하고 진정성을 가진 여인을 만나십니다. 이 가나안 여인은 모성애와 진정성을 밑바탕으로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딸의 고통을 함께해온 어머니로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부끄러움없시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필요한 은총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시험하시려고 매몰차게 그 여인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그것도 너무나 매정하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는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시면서 거절하십니다'. 여기서 강아지는 이방인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이 너무 강해서 유대인외에는 모든 민족들을 개에 비유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가나안 여인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강아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 여인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가나안 여인은 너무나 보기좋게 

연중 19주일 강론

  요즘 현대인들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혼자 있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우 여러분들은 하루 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정도 인가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항상 관계를 맺기 위해서 공동체 생활을 합니다. 이 공동체 생활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에게 속하면서 가정공동체를 이루고 삽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서는 유치원을 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사회공동체 즉 학교공동체에 속하여 친구관계도 맺고 이성간의 교류도하고 살아갑니다. 대학교까지 이어지면서 졸업과 동시에 직장공동체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이전의 공동체와는 조금 다릅니다. 경쟁을 하고 승진을 하고 인정을 받기위해 여러가지 수단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관계속에서 자신이 하기싫은 것도 감수하며 공동체를 위해서 또 공동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 삶안에서 인간은 반드시 혼자 만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필연적인 문제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조금의 짬을 내어 혼자 가만히 있는 시간을 만드시고 습관화 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이는 아이대로......하루에 30분이라도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 보세요. 처음에는 습관이 안되어서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고독의 기쁨과 충만함을 느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해주시고 오천명을 먹이시고 바쁜 일정을 보내셨지만 제자들까지 따로 보내시면서 혼자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기도가 필요하셨겠습니까? 그분이 바로 하느님이신데 굳이 기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을 물리시고 혼자만의 시간, 고독을 찾아 가신것입니다. 치유활동과 개인과 집단에 기적의 축복은 오로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면 혼자만의 시간은 당신과 하느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스스로 만드시

연중18주일 강론

연중 18주일    지난 주에 저는 인간의 3대 욕구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인간 삶에 제일로 기본이 되는 식욕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오늘의 복음 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아시는 의사이시고 심리학자 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과 기적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하더라도 배고픔 속에서는 제대로 말씀과 기적을 이해하지 못함을 잘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복음말씀 중에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이 가엾음은 영적인 것이나 물질적인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배에서 내리시어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써 그들에게 신체적 건강을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듯 저녁이 되었고 사람들의 배고픔을 아시고는 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이 기적은 이제까지 일으키신 기적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베푸신 기적은 개개인의 치유라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개개인을 넘어 집단에게 베풀어주신 기적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4개 복음서에 다 기록된 복음입니다. 모든 교우들께서 아시는 것처럼 4개의 복음서는 저자들이 각각 다릅니다. 가장 먼저 쓰여진 마르코 복음을 참조하여 마태오, 루가 복음이 쓰여지고 가장 나중에 쓰여진 것이 요한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어째서 4개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걸까요? 분명히 오늘의 복음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이 장차의 성체성사를 예시하는 것이고 하늘나라에서의 식사를 예견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허기를 채웠지만 우리는 영적인 허기를 예수님을 통해 채우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