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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September, 2022

연중 제26주일 강론

  지난주는 본당의 날이면서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 많은 교우분들이 오셔서 견진성사 받은 분들을 축하해 주셨으며 오랜만에 방문하신 Loi 대주교님을 진심으로 환영해주셨습니다 . Lori 대주교님께서 가시면서 너무나 좋은 시간이었고 진심으로 환영해주신 교우들께 진심 어린 고마움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교회공동체의 이름으로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 Lori 대주교님께서는 과거에 주일 미사에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신 적이 한번 있었으나 견진성사를 집전하신 것은 처음이라 하시면서 아주 좋은 인상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   과거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 아침에 어느 집 대문 앞에 간난 아기가 포대에 쌓여 놓여 있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이 보았고 , 아기를 살펴보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 이에 지나가던 사람은 경찰에 신고했고 , 그 집 주인을 살인죄로 고발하였습니다 . 재판 결과는 집주인에 대해서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 왜냐하면 , 대문 밖에는 주인의 땅이 아니라 국가 땅이기 때문에 그 주인은 아기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 이 소식을 들은 국민은 그 주인에게 야유 , 비난과 저주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 야유와 저주와 비난을 보낸 그 이유는 아마도 법률적으로는 무죄일지는 몰라도 윤리 • 도덕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 아마도 그 아기가 자기 집 대문 밖에 있는지도 몰랐을 수 있었습니다 .   오늘 복음이 위의 예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오늘의 이 비유는 상상적 비유 (imaginative parable) 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일반 비유와는 좀 다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 부자는 라자로를 몰랐을 수 있었습니다 . 그러나 분명하게 집 앞을 나오거나 들어가면서 보았을 것입니다 . 오늘 비유말씀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분명히 보았을 라자로의 모습을 무관심으로 일관한 부자를 나무라고 계십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아침 , 저녁으로 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 낮에 쬐는 햇빛으로 기분이 좋은 가을 날씨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오늘 우리 본당은 연중 제 25 주일 미사를 하지 않고 , 우리 본당의 주보들이신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화요일 미사를 오늘 주일에 봉헌합니다 . 또한 오늘 우리 본당에서는 성인 18 분과 청소년 11 명이 볼티모대교구 William E. Lori 대주교님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습니다 . 견진성사를 받는 분들이 하느님의 축복과 앞으로 신앙생활을 더욱 견고하게 하며 살아가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 특별히 우리 청소년들이 신앙을 잃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한국순교자들 특별히 성 김대건 신부님과 성 정하상 바오로 , 동료순교자들은 1984 년 5 월 6 일에 성 요한바오로 2 세로부터 성인품에 올라서 보편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9 월 20 일에 순교자들을 기념합니다 . 잘 아시는 것처럼 한국에 가톨릭교회에 처음 들어온 것은 1784 년 , 이승훈 ( 베드로 ) 이 중국 베이징에서 프랑스 사람 그라몽 (Grammont) 신부님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가톨릭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 이승훈은 조선으로 돌아오자마자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 지금의 명동 성당 부근의 명례방에서 정기적인 신앙 집회가 이루어졌습니다 . 이러한 사실은 아주 특히하게 세계 교회사에 기록되었습니다 . 다름이 아니라 , 외국 선교사에 의해서 조선 땅에 가톨릭교회가 전해진 것이 아니라 , 우리 민족 스스로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 아마도 세계 교회사 안에서 전무후무 ( 前無後無 ) 한 사건 일 것입니다 . 가톨릭교회가 조선 땅에 들어올 당시 우리나라는 국가와 사회의 이념적 근본을 유교에 두고 있었으며 , 그 사상과 실천은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의 바탕이었습니다 . 그런데 일부 실학파 학자들은 중국을 통하여 전래된 서적과 함께 접하게 된 새로운 종교 , 곧 가톨릭의 가르

연중 제24주일 강론

  가을바람이 아주 시원합니다 . 가을 햇살은 비타민 D 가 많이 생성한다고 합니다 . 아무리 바빠도 가을 햇살을 자주 만나면 좋겠습니다 . 어제가 한국의 추석이었습니다 . 고향 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지난 ‘ 힌남노 ’ 태풍으로 경주와 포항에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 태풍의 피해를 받은 분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복귀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 많은 자원봉사자가 추석도 잊어버리고 전국에서 왔다고 합니다 . 우리는 기도로써 그들의 아픔에 함께 하였으면 합니다 .   오늘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서 루카복음 15 장을 읽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 ‘ 되찾은 양의 비유 ’ ‘ 되찾은 은전의 비유 ’ 우리가 잘 아는 ‘ 되찾은 아들의 비유 ’ 를 말씀하십니다 . 오늘 복음은 짧은 복음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의 세 가지 비유를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 ’ 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   복음의 시작은 예수님 주위로 ‘ 세리들과 죄인들 ’ 이 모였고 , 그 모습을 ‘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 보고 있다고 전합니다 . 세리들과 죄인들이 왜 예수님 주위에 모였을까요 ? 복음서 여러 곳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많은 호의를 베풀어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호의가 아니라 항상 호된 비판과 꾸지람으로 일관되게 질책하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 이 두 집단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자주 만나는 집단입니다 . 계층으로 보면 앞의 집단은 절대적으로 유대인 사회에서 유대인들과 공생할 수 없는 집단입니다 . 어디를 가나 이 ‘ 세리 ’ 와 ‘ 죄인 ’ 들은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인권이나 존엄성과는 거리가 멀게 대우받았습니다 . 예수님 시대에 세리들이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은 이유는 , 세리가 징수하던 세금은 부정기 간접세로서 , 특히 국경을 넘어가는 물품에 대한 관세가 있고 , 시장세 . 통행세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 세리는 징세권

연중 제23주일

  9 월 첫 주일입니다 . 9 월에도 교우분들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낮 햇볕이 따갑고 덥지만 불어오는 바람에서 가을바람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 9 월은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는 순교자 성월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 한국 순교자들을 묵상하는 9 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   지난주 22 주일 복음에서 ,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간 본능의 하나인 명예욕까지도 뛰어넘을 것을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낮추면 하느님과 타인들에 의해서 높여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은 지난주 말씀에 이어서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 예수님 이전의 십자가는 무엇을 상징한 것입니까 ? 그것은 다름 아닌 ‘ 저주 ’ 의 상징입니다 . 역사적으로 십자가는 페르시아인들이 고안해 낸 사형 도구였습니다 . 이 십자가의 사형 제도은 페르시아인들이 만들었고 알렉산더 대왕과 그 후계자들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 이러한 흐름은 로마 제국 시대에 와서도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 로마 제국에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십자가형을 시행하지는 않았지만 , 그 외의 제국의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드는 사람에게 특히 많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님은 로마 제국에는 국가 전복의 반기를 던 역적으로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을 모독한 신성 모독죄로 십자형을 받았습니다 .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죄인은 자신이 직접 십자가를 지고 형 집행장소까지 가야 했습니다 . 십자가 형벌은 극악무도 ( 極惡無道 ) 한 죄인에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기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돌아가셨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 사건으로 연결되었기에 , 더 이상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수치가 아니라 우리 인생에서 오는 시련과 삶에서 짊어지고 가야 하는 고달픔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예수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