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6주일 강론

 지난주는 정말로 따뜻한 봄날이 며칠 있었습니다. 봄이 왔나 싶다가도 며칠 온도가 내려가면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으로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어느 한국 시인의 말처럼 우수와 경칩이 아직 멀었기에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19일 토요일이 우수(雨水)입니다. 입춘과 경칩 중간에 있는 절기로 봄이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심심풀이로 절기들을 좀 알고 살면 우리 몸 안의 생체 리듬이 더욱 활발하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최대 궁극목적을 행복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모든분들이 어렴풋이 동의하리라 생각됩니다. 과연 행복이 무엇입니까? 이 자리에서 각자 그 정의를 한번 내려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답도 없고 틀린 답도 없는 물음입니다. 자기만의 행복을 성취하고 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참된행복(Beatitude)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진복팔단(眞福八段)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오늘 루까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행복(μακαρισμός, 마카리스모스)은 축복과도 같은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이 용어는 오직 하느님 나라의 참여를 통해서 오는 결정적인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속적인 행복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행복은 사람에게 적용되며 뒤따라 나오는 내용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이러한 행복은 종말론적인 구원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신약성경에서의 행복은 엄청난 정서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종종 거짓 행복과는 반대가 되며, 하느님 나라의 최우선의 좋은 것이 일차적이라면 모든 세속적인 가치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행복선언과 마태오 복음의 행복선언은 거룩한 역설(sacred paradoxes)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의 가치들 전환에 영향을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행복하고, 지금 우는 사람들이 행복하며,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중상을 당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세계 역사 안에서 이렇게 살다가 하느님에게로 가신 많은 분을 간접적으로 성경이나 책에서 또는 언론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이렇게 살다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름 모를 한국의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행복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목숨을 바쳤고 그분들은 참된 행복을 맛보고 계십니다.

 

우리 교우분들은 지금의 삶에서 최고의 행복을 만끽하고 살고 계십니까?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고,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 있었나요? 분명히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지금까지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 순간 우리의 행복을 어디에 두고 살고 있습니까? 물질에 두고 있습니까? 명예에 두고 있습니까? 장수와 건강에 두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에 그 목적을 두고 행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정(Journey)의 시작입니다. 그 여정의 목적을 하느님 나라에 두십시오. 그런데 그 하느님의 나라가 단순히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hic), 여기서(nunc)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현실의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맞는 행복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세상 사람들이 즐겨 찾는 행복도 함께 들어 있음을 깨닫고 살았으면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 우리는 모두 해당됩니다.

 

하느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에 은총을 주시어 우리 삶과 생각을 변화를 주시어 세속적인 행복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향하도록 힘을 우리 교우들에게 주시기를 한 주간 기도합니다.

Comments

Popular posts from this blog

한가위 미사

연중 제7주일

연중 제31주일 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