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대축일 미사

 다시 한번 성탄 인사드립니다. 성탄의 축복이 모든 교우에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본당에 아픈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아픈 분들에게 치유의 은총으로 다신 건강한 몸과 마음이 되어 주님의 제단에서 다시 만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어젯밤 미사의 복음은 마태오 복음 1장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는 첫 장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진정한 인간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사건입니다. 인간이 되신 사건이 사람들의 눈속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확신을 복음을 읽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족보를 복음서 첫 장에 기록한 것입니다.

 

성탄 낮 미사의 복음은 공관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 공관 복음의 공통적인 관점인 인간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혀 다른 철학적이며 그중에서도 형이상학(形而上學)차원에서 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묘사합니다. 그 말씀은 태초부터 존재하였고 지금은 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합니다.

 

성서학적으로 보면 요한복음은 세 개의 공관 복음보다는 제일 늦게 쓰였습니다(100년경). 요한이 복음서를 서술할 때의 배경과 공관 복음의 저자들이 복음서를 서술할 때와는 시대적 배경이 안전히 달랐습니다. 요한이 복음서를 서술할 때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is)라는 사조가 시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는 100년경 아직 어린 그리스도교 교회를 괴롭히는 가장 큰 위험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이교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와의 대결 흔적은 신약성서의 몇몇 구절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최고의 절정에 도달하였다. 영지주의는 글자 그대로 인식을 의미합니다. 1세기와 2세기의 이교도의 종교와 영지주의에 물들었던 그리스도교의 이단설은 영지주의라는 단어를 단순히 인식으로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구원에 대한 인식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항에서 요한은 복음을 서술하면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우리와 함께 사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인간으로 오심을 말씀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이 사건을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묘사하며 거룩한 탄생으로 지금까지 경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이 사건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성탄을 잘 보내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고 가까이 있는 가족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탄과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어두운 면들을 씻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미움, 시기, 질투 등을 소 마구간에 누워 계시는 예수님께 드리고 가난하고 소박하게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도록 합시다.

다시 한번 성탄 인사를 드리며 본당의 모든 가족이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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