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3주일

 벌서 12월도 중순으로 들어왔습니다. 대림 3주일을 지내고 대림환에는 분홍색 초에 불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제 성탄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에 독감으로 입원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를 접하였습니다.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직도 해리스버그 한인 성당에 미사를 가고 있습니다. 주임 신부님께서 아직도 비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입국을 못 하는 실정입니다. 많은 교우분이 걱정해 주시지만 저는 기쁜 마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묵상 중에 최양업 신부님이 생각났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최양업 신부님은 한국의 첫 신부님이신 김대건 신부님과 동기생으로 두 번째 신부님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신품을 받으시고 조선 땅에 입국하시고 1년 반 만에 체포되어 순교하셨다면, 최양업 신부님은 조선에 입국한 후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순방을 하였는데 1850년부터 1861년까지 프랑스 선교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을 맡아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경상도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숨어지내다 베르뇌(S.F. Berneux) 주교님에게 사목활동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던 중 문경에 있는 교우촌에서 과로로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님은 하루에 300리 길을 걸어 교우들을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최양업 신부님을 생각하면 제가 해리스버그 가는 길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림 3주일의 복음에서 우리는 지난 주일처럼 또 세례자 요한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와는 다르게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보내면서 의외의 질문을 예수님께 던집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지난주 복음에서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해서 너무나 확신에 찬 선포를 사람들에게 하였습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날 자격조차 없다.”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더 기다려야 하는가 하고 묻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질문에 점잖게 말씀하십니다. 몇 가지 현상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하십니다. 정말 예수님다운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제자들을 보냈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이 생각한 메시아의 역할과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메시아로서 전교 여행을 하시면서 보여준 행위가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나와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면서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에 중점을 두었다면, 예수님 역시 회개를 선포하시면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행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행위들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을 살리시는 행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자비가 가득한 분이시고 우리를 치유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를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오게 하며, 인간의 잘못으로 하느님과 멀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그분의 역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예언자 이상으로 칭송합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 말씀으로 세례자 요한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대림 3주일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칭송한 세례자 요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면서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우리 각자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에서 항상 하느님을 의심하고 나에게만은 축복과 은총이 없을을 불평하고 의심하고 신앙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면서, 남에게 주시는 은총과 축복에 질투를 느끼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자비를 우리 각자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교만과 질투와 미움이 그분의 은총과 축복을 가로 막지는 않는지 돌아보는 대림 3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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