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웁니다. (사순 제5주일)
예수님은 웁니다
(사순 제5주일)
예수님이 우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들 앞에서 웁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연민 때문입니다. 함께 고통받기 때문이죠.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아니, 울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고속도로 휴게실 남자 화장실 소변기 위에 쓰여 있는 말입니다. 특별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말입니다.
2003년 5월 8일 어버이날, 대구 신학교는 신학생 부모님들을 초대해 하루를 같이 보내고 미사가 이어졌습니다. 그 당시 미국 클리브랜드 유학이 결정된 저는 미사 마지막에 아버지가 제게 쓴 편지를 읽도록 불리움 받았습니다. 담담하게 독서대에 올라 두 문장을 읽었는데 그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평생 제게 편지 한장 쓰지 않았던 아버지, 심장수술과 두번의 뇌출혈, 홀홀단신으로 고향을 떠나 대구로 와서 가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아버지의 편지를 읽기 시작하자 수백명 사람들 앞에서도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마리아와 유다인들을 보고 예수님이 우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라자로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와 함께 고통받기를 선택하셨고, 그의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라자로는 죽어야 했습니다. '라자로(Lazarus)' 이름이 뜻하는대로 '하느님의 도움'이 드러나려면 고통을 견디고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아픈 라자로는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 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픈 우리도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기심, 경쟁심, 잘못된 욕망도 죽어야 합니다. 타인을 향한 원망, 시기, 악의도 죽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미움, 게으름, 무관심도 죽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머리로, 입으로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울지 않습니다. 회사나 조직은 울지 않습니다. 똑똑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 자만하는 사람은 울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웁니다. 함께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우셨습니까? 드라마 보다가 운 것 말고 남의 고통을 보며 언제 울었습니까?
"돌을 치워라"(요한 11,39). 무덤을 막았던 돌은 육중하고 두렵습니다. 내가 짓는 죄, 실패와 절망, 고통의 기억은 계속해서 나를 짓누릅니다. 겉만 멀쩡하지 속은 베이고 찢기고 녹아내립니다. 육중한 돌에 짓눌려 숨쉬기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급한 것은 돌을 치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변명거리는 늘 있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부끄럽습니다.' '견딜만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부활과 생명은 선택입니다. 어두운 곳, 죽은 자가 머무는 곳, 죄의 결과인 무덤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외치십니다. 바오로야, 무덤에서 이리 나와라. 루시아야, 죄에서 이리 나와라. 요셉아, 너 자신에게서 이리 나와라. 그 다음에는 우리 눈을 덮은 이기심과 경쟁심에서, 우리 손을 감은 온갖 종류의 물질적 욕망과 허영에서, 우리 발을 묶은 게으름과 변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제대로 걸으며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어두운 곳(자궁)에서 와서 어두운 곳(무덤)으로 간다. 그 사이 반짝이는 것을 삶이라 한다."(카잔차키스) 삶이라는 빛 안에서 비로소 발견한 내 눈앞에 계신 예수님, 그분 눈에 어린 눈물을 볼 때 우리 삶 역시 반짝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감사한 삶, 아름다운 삶, 은혜로운 삶의 종착지는 무덤이 아닙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요한 11,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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