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작 ( 연중 제 3주일 )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습니다.
결혼생활의 시작, 직장생활의 시작, 육아의 시작, 신앙생활의 시작 등, 여러분이
기억하는 모든 일의 시작은 어떤 느낌을 줍니까? 기대와 걱정, 설렘과 두려움, 희망과
긴장이 공존하는 묘한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의 저자 루카 역시 그러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손을 대었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장편서사의 첫 문장을 쓰는 것처럼
설레면서도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한국을 떠나 14년만에 미국에 다시 왔습니다. 공교롭게도 워싱턴
공항으로 들어왔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같은 시간에 이 나라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임기를 시작하는 때였습니다.
정 신부님과 총회장님, 사무장님의 배웅을 받고 볼티모어로 오는 길은 맑은
날이었다가 눈보라가 치고 다시 날이 개는 이상한 날씨였습니다. 너무나도 추운
이곳에서 시차적응할 틈도 없이 혹한기 훈련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계속 먹고 마셨고 거기다가 하루만에 5년치의 일을 인수인계 받으며 아마 제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할 시간을 시작합니다.
예수님도 시작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40일간 단식을 하고 성령을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온 첫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를 눈여겨보던 사람이
성경 두루마리를 건네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1,18-19).
놀라운 이 말씀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1,21)는 선포로 끝을 맺습니다.
오늘 볼티모어 한국 순교자 성당 신자 여러분과 첫 주일을 시작하며 듣는 예수님의
선포는 바로 제가 살아가야 할 사명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여러분 가운데 물질적 혹은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분노와 두려움, 죄와 미움에 사로잡히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모두가 살아가야 하는 삶과 죽음, 신앙의 의미에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는 일이 바로 제 몫임을 말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유배 후 몇 십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생활의 터전이 무너진 것보다 더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은
폐허가 된 성전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현실이 너무 크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날에 에즈라 사제는 침울한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설명해 줍니다.
백성들이 몇 십년만에 성전에서 성경 말씀을 들으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러자
에즈라 사제는 온 백성을 타이릅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입니다"(느헤 8,9-10).
제 마음이 에즈라 사제와 같습니다. 새성전 건립이라는 어려운 일 앞에서 걱정과
두려움을 느끼는 신자들에게 에즈라 사제처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고 따르면
바로 그것이 여러분의 힘이자 하느님의 기쁨임을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어렵습니다. 그런 시작이 없다면 보람된 마침도 없습니다. 루카
복음의 시작,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 제 사목의 시작에서 저는 하느님의 현존과
이끄심을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된 신앙공동체로,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누구하나 요긴하지 않은 사람
없이 많은 지체들이 한 몸을 이루어 나아간다면 다가올 시간은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포하신 희년을 살아가는 희망의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여러분이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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