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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October, 2024

연중 제 30주일 강론

  10 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 우리 교우분들 남은 10 월 잘 보내시고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주에는 손님 신부님 두 분과 뜻하지 않게 군종 신부님 두 분이 오셨습니다 . 교중 미사에는 손님 신부님과 군종 신부님 두 분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 함께한 신부님들 위에서 기도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연중 제 30 주일에 들어왔습니다 . 이제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외침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장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평생의 소원이었던 볼 수 있게 치유해 주십니다 . 소경이며 거지로 살아 온 바르티매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로 주시면서 ,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십니다 .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성경에서 말하는 “ 자비 (Mercy)” 는 과연 무엇입니까 ? ‘ 자비 ’ 라는 단어의 현대적 용법에 의하면 동정심 내지는 용서와 동일시 되고 있습니다 . 이 자비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는 동정심과 충실성이라는 두 가지 사상의 접합점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 자비라는 단어의 히브리어의 뜻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본능적 애착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이 히브리어의 자비 (rahamin) 는 어머니의 품 , 아버지와 형제의 심장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 그리스어의 ‘ 자비 (eleos)’ 라는 단어는 두 사람을 결합시켜 주는 관계를 의미하며 또한 충실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 자비는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그 견고한 바탕을 가지게 됩니다 . 즉 , 자비는 그 본질과 목표에 있어 본능적 선이 아니라 , 오히려 의식적 의지에서 나오는 실천적 선입니다 . 이것은 내적인 의무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책임있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들의 현대적 번역들은 “ 자비 ”...

연중 제 29주일 강론

  완연한 가을입니다 . 한국에서 오신 신부님들과 여행 중에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가을의 절정으로 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고 감탄하기도 하였습니다 . 한국보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면서 좋아하시는 신부님들 보면서 볼티모 성당으로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담형식 말씀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 사도 중에서 베드로 사도와 같이 사도단의 기둥 역할을 하는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 베드로와 더불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형제 제자들입니다 . 또한 이들은 스승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한 사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 야고보 사도는 초대 예루살렘의 주교였습니다 .   그런데 이 형제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께서 “ 영광을 받으실 때 ( 영광스럽게 될 때 )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 라고 청합니다 . 재미있는 것은 ,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로서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8,38. 13,26. 14,62). 그러나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다닐 때 그분을 종말에 오실 분이라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짐작하고 그분이 지상에 메시아 왕국을 세울 날을 은근히 기다렸습니다 .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왕국을 세우시면 당연히 제자들에게 높은 자리를 하나씩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지난주일 복음 마지막 단락에 베드로 사도는 “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 베드로 사도의 이 표현은 은근히 무엇인가를 바라는 수고의 보상을 재촉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아닌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강하게 바라는 현실의 우리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결국 사도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

연중 제 28 주일 강론

  아침 , 저녁으로는 쌀쌀하다 못해 춥다는 느낌이 듭니다 . 그러나 한 낮의 햇살은 좋습니다 . 지난주 본당 골프대회에 많이 참석해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 화창한 가을 날씨 속에 모두가 한마음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 좋은 날씨를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리고 골프대회를 준비해 주신 준비위원님들과 맛있는 점심과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 주님께서 봉사자분들의 노고를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   연중 28 주일의 예수님 말씀에서 어떻게 보면 , 우리를 힘들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 오늘 복음은 “ 하느님 나라와 부자 ” 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어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대화를 나눕니다 .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켜온 사람인 것 같습니다 . 복음은 “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면 이르셨다 .” 라고 우리에게 전합니다 . 예수님께서도 이 사람이 살아온 삶을 아셨을 것이고 그렇게 살아온 것을 인정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완벽한 인간은 없기에 이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있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 이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길이 완벽에 가깝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 이 사람이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인 것을 몰랐습니다 . 그저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 이때까지만 해도 , 이 사람은 자기가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 “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하 .... 우리는 이제 이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 조금전...

연중 제 27 주일

  10 월의 첫 주일입니다 . 따뜻한 가을 햇살을 만끽하는 10 월이 되시길 기도하며 , 하느님 사랑 안에서 건강하시고 행복한 10 월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 태풍의 영향으로 한동안 햇빛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 습기 찬 몸과 마음이 가을 햇살과 하느님의 광채로 맑고 밝았으면 좋겠습니다 . 10 월 첫 주일은 본당의 골프대회가 있는 날입니다 . 많이 참석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참석한 교우분들이 기쁘고 , 보람차고 일치하는 대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   연중 제 27 주일 독서 말씀과 예수님 말씀은 남녀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 또한 복음 마지막 단락은 가정의 소중한 선물은 어린아이들에 대한 말씀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혼인법과 이혼법을 살펴보면 , 꿈란 종파만은 일부일처제를 주장한 데다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반대로 바리사이들은 일부다처제를 묵인했을 뿐 아니라 신명기 24,1-4 를 따라 이혼과 재혼을 쉽게 허락하였습니다 . 여기서 이혼이란 언제나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여 내보는 것을 뜻하는데 , 아내에게 “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야 ”( 신명 24,1)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 수치스러운 일은 간음 , 풍기문란 , 음식을 태우는 것 , 계명을 어기는 것 ,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 등을 말합니다 . 남편이 아내에게서 이런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줍니다 .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됩니다 . 이혼장에 소박 사유를 쓸 필요는 없고 , 단지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니 다른 남자가 데려가도 무방하다는 내용을 적은 다음에 남편과 두 증인이 서명하고 장소와 날짜를 기록하면 충분하였다고 합니다 .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로 어처구니없고 너무나 불공정한 법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당신을 골탕 먹이려는 바리사이들과 논쟁을 벌이지만 , 어떤 사유로 아내를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