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새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제 새해를 시작하면서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하였는데, 벌써 1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날씨가 추우니까 교우분들 건강관리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한 분의 교우가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연중 4주일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마태오 복음 5장의 산상설교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으로 시작하는 산상설교의 말씀을 과거에는 행복선언혹은 진복팔단(眞福八段)이라고 하였습니다. 새로 번역된 한글 성경에는 산상설교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Beatitudes’라고 표기되어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지복(至福), 극한 행복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서학자들은 네 복음서 가운데서 예수님의 교훈을 집대성한 단락 하나만 꼽으라면 누구나 마태오 복음에 수록된 산상설교(5-7)를 듭니다. 그런데 산상설교에 수록된 교훈을 얼핏 살펴봐도 예수님의 예리한 통찰력과 독보적인 표현에 감동을 받기 마련이지만 아무래도 곧이곧대로 지키기는 어렵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분의 교훈을 지키도록 애써야겠지만 액면 그대로 다 지킬 수 없으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는 산상설교의 실천을 강조했고, 개신교에서는 실천할 수 없다는 견해를 표명하곤 하였습니다.

산상설교의 실천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보면, 과거 프란치스코회 신학자 보나벤투라는 예수님께서 일반 백성을 상대로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게 하셨다고 하면서, 이는 평신도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고 수도자들을 상대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하였습니다. 다른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밝혔지만, 오늘날에 이러한 견해를 따르는 성서학자들은 없습니다. 이 산상설교에 대해서 많은 견해가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윤리를 제창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처사를 본받는 윤리를 주창하셨다고 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야 마땅하지만 따르자니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에, 과거처럼 여러 가지 설들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중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런데 온 마음으로, 온 영혼으로, 온 정신으로, 온 힘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끝이 없듯이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데도 끝이 없습니다(마르 12,30-31). 이웃 사랑의 끝없음을 극명히 설파하신 말씀이 원수 사랑의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원수들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을 밝히시며,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아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모방하는데 데는 한도 끝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 사랑의 계명에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원대한 이상, 지대한 목표를 제사했다고 하겠습니다. 연약한 인간이 자력으로 저 이상적 목표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이상적 목표를 향해 나날이 성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윤리를 목표 규범 또는 성장 규범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장은 오늘 말씀하시는 산상설교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감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윤리적 성장이나 신앙적 성장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발 한발 걸음걸이를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 자신에 요구되는 윤리적 결단, 신앙적 결단 역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임을 반드시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은 각자 자신의 내면의 움직임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산상설교 말씀에 충실히 따라 산 분들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러했고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 총살을 자원한 마리아 꼴베 신부님이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행복한 사람은 이 현실에서 시작하여 현실을 거치면서 현실 안에서 성장하여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는 말씀입니다. 현실 중에서만 강조해서도 안 되고 현실을 무시한 하느님 나라만 강조해서도 안 되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그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현실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추구하지 않으면 하느님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며 하느님 나라에서도 각기 다른 상황에 있겠지만 지상에 있던 그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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