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요한 성탄 미사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가장 고요한 성탄 미사
(주님성탄대축일)
2020년 성탄절을 이틀 앞둔 12월 23일 대구교구 군위본당 주임신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코로나19의 재확산으로 인해 교구에서는 두번째 무기한 미사 중단 발표가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신자들과 함께 그날 저녁 미사에서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미리 모셨습니다.
성탄절이 왔습니다.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쁜 밤이 왔지만 아무도 성당에 오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미사 준비를 하고 성가를 부르고 구유 경배를 하고 성탄성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미사 후 불꺼진 성당에서 예수님 구유 앞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은 코로나로 인해 두려움에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모두 격리된 채 각자의 자리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맞아야 했습니다. 어느 때보다 평화가 절실했고 죽음을 이기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승리의 하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눈앞에 계신 하느님은 너무나 나약해 제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셨습니다.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아플 것 같은 무력한 아기였습니다.
고요한 밤, 평화와 생명에 대한 절실함이 가득한 밤, 아기 예수님 앞에서 언젠가 들은 '본디 성탄은'이라는 글이 비로소 제게 와 닿았습니다.
본디 성탄은
아주 보잘것없고
초라합니다
갓난아이, 마구간, 가장 가난한 이들,
그리고 힘 있는 자들을 피해 달아나는 것.
바로 그것이
하느님과
관계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작아지십니다.
하느님이 약해지십니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사랑으로.
그리고 당신을 따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승리와 광채와 영광이 아니라
마구간의 초라함 속으로.
내 초라한 마구간으로
내 약한 사랑 속으로
내 능력의 한계 속으로
나의 거절 속으로.
하느님이 아주 작아지십니다.
우리와 함께
걸으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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