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바라는 마음 (대림 제3주일)

 

은근~ 바라는 마음

대림 3주일

인류의 원죄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섭섭한 마음.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한 뱀이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먹어서는 된다.'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하고 물었을 여자는 대답합니다. "아니다. '우리는 모든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되지만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으면 인간이 반드시 죽을 것이니 먹지 마라고 하셨지 만지지도 마라는 말씀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뱀의 계략에 빠진 여자는 하느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줄려면 것이지 그건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지!'

그때 뱀이 결정적인 한방을 날립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창세 3,4-5). 분명 하느님께서는 숨기는 것이 있으신데 그건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는 ' 막으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께 섭섭한 여자는 슬기롭게 것처럼 탐스러운 열매를 먹습니다.

인류의 원죄 이후, 섭섭한 마음은 인간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누가 나의 봉사를 알아주지 않으면, 나의 선행에 대해 감사하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은 금방 올라옵니다. 섭섭한 마음이 쌓이면 원망이 자라고 상대를 미워하고 험담을 시작하는 것이 인간 본성처럼 여겨집니다.

"섭섭한 마음은 은근~ 바라는 마음에서 옵니다." 대구교구 이상재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나의 봉사를 은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나의 노력과 재능을 은근~ 드러내고 싶은 마음, 나의 선행에 은근~ 감사받고 싶은 마음이 섭섭한 마음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은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사제가 신자들에게 은근~ 바라는 마음, 봉사자가 남에게 은근~ 바라는 마음, 부부가 배우자에게 은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대신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 죄에 대한 보속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 칭찬을 듣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섭한 마음, 살다보면 피할 없는 상처는 다가옵니다. 상처주는 말과 상처받는 느낌은 수만가지입니다. 하지만 상처를 붙들고 키우고 상처를 헤집어 크게 만드는 것은 유혹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자기연민에 빠져 나만 불쌍하고 나만 힘들고 나만 희생한다는 생각에 갇혀 자기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때 원망이 쌓이고 뒷담화라는 유혹에 빠집니다.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됩니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심판자께서 앞에 계십니다"(야고 5,9).

사람 사이에 상처가 있어도 그것을 원망으로 키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판에서 자유로워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상처를 원망으로 키우고 상대를 심판하게 되면, 상대뿐만 아니라 나까지 심판하는 심판자가 우리 삶에 들어오게 만드는 것입니다. 앞에 계신 심판자가 들어오도록 문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하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랑은 감성적이며 자발적인 것인데 예수님은 의지적 행위로 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누구에게나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습니다. 제발 지구를 떠나주었으면 하는 사람을 마음에 떠올리고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모든 이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앞에 요술 단추가 하나 있다고 상상합시다.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나는 사람과 즉시 다정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단추를 누르겠습니까?

이것은 인간관계 전문가인 데이빗 번즈가 제시한 실험인데 실제로 그걸 누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에 대해 말해줍니다. 우리는 누가 싫으면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지 않고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명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시발점은 내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같은 죄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선 주일입니다. 내게 평화가 없다면 아무것도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서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시는데 우리는 무엇을 내어줄 것입니까? 은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섭섭하고, 그래서 원망하고 험담하는 마음에 아기 예수님께서 머무실 있을까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나의 죄를 보속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사랑하려 한다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맞을 준비가 것입니다.

오소서 평화의 주님, 우리 마음에 오시어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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