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사랑의 순교자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를 찾아나서고 배우고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인 실학자 이벽은 '천주공경가'를 지었습니다.
"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 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이내몸은 죽어져도 영혼남아 무궁하리 / 인륜도덕 천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재산을 몰수당하고 잡혀서 참수형을 당하고 가문이 몰락하고 아내와 자식이 노예로 팔려가도 천주교를 믿었던 지식인들, 그리고 배운 것이 없어 글도 모르지만 '천주(天主)'라는 말 한마디를 믿고 박해를 피해 산골에 숨어살면서 죽기까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던 하층민들은 모두 하나같이 신앙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간절하게 천주교에 매달리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조선시대 유교문화에서 한번도 체험하지 못했던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왕이 나와 같은 평등한 피조물이라는 사실, 계급이나 출신없이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심지어 남녀간의 차이도 없다는 사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모습따라 지어진 모든 사람이 천주를 믿어 죄를 용서받고 신앙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이 세상에서 맛보는
새로운 세상,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로마 8,39)"을 처음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살면서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의미와 고통과 죽음, 무엇보다 천주(天主)에 대한, 천주(天主)를 향한, 천주(天主)에 의한 사랑을 체험했기에 고난과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 순교자들은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왕은 사라졌지만 권력은 여전합니다. 거짓 우상은 돈이 차지했습니다. 불의와 차별이 정의와 공정을 짓누르고,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갈등만 있습니다. 사랑을 모릅니다. 고통과 죽음이 두렵습니다.
이때 저는 정하상 바오로를 떠올립니다. 유복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시절을 보내다가 천주교 때문에 아버지와 형이 자신의 눈앞에서 참수당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과 살아남았던 그. 재산을 몰수당하고 집안에서 버림받고 동냥하며 살아남아야 했던 그. 하지만 한번도 천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고 그분을 원망하지도 않았던 그를 떠올립니다.
1839년 9월 22일, 구름 한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서소문 형장에서 그는 하늘을 쳐다 보았습니다. 45년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감옥에 계신 어머니와 여동생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2티모 4,7).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리며, '최선을 다했다.' 생각합니다. 파란 가을 하늘처럼 그의 마음도 가볍습니다.
고난과 박해를 견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의 이야기는 과거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새로운 고난과 박해를 견뎌내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하는 것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처럼 주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도 어리석은 자들처럼 벌과 파멸로 여기지 않고 불사의 희망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환난과 역경, 박해와 위험에서도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겠습니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합니까?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 사랑의 순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
예수님 말씀이 정녕 옳습니다. 다시 순교자의 마음을 새기고 나의 것으로 삼습니다.
사랑하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죽지 않으면 그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죽음이 나에게 닥쳐 왔을 때 무엇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평생을 애썼고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사랑의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죽을 때 사랑했다고, 목숨을 걸고
사랑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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