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와 콜베 (연중 제 20주일)
람보와 콜베
(연중제20주일)
어릴적 즐겨보았던 영화가 있었는데 '람보'였습니다. 기관총 M60을 한손에 들고 수없이 날아드는 총알 속에서 수백명의 적들과 싸우고 심지어 헬리콥터마저 화살로 격추시켜 떨어트리는 베트남 전쟁 영웅은 불타는 모든 것을 뒤로 한채 유유히 걸어 나옵니다. 그는 불의한 세상에 정의의 불을 지르는 영웅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에서 받은 주특기가 M60이었습니다. 어릴적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한손으로 10Kg이 넘는 기관총을 손에 들고 사격을 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도 람보 흉내를 내며 불의한 세상에 정의의 불을 지르고 유유히 걸어나오는 그를 떠올렸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49).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람보처럼 불의한 악당을 응징하고 모두 불로 태워버리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은 '예수님께서 받아야 하는 세례'(루카 12,50)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 14일 축일이었던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가 떠오릅니다. 그는 독일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죽이고 불에 태우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한 명의 죄수가 탈출한 뒤에 대신 죽을 운명에 처한 어떤 남성의 절규를 듣습니다. 그는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었고 콜베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그를 대신해 죽겠다고 나섭니다. "너는 누구냐?" 나치 장교가 묻자, "나는 가톨릭 사제요."하고 대답한 콜베 신부는 그의 뜻대로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칩니다.
콜베 신부는 예수님처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세례로 한 생명이 살게 되었고, 동시에 그의 희생은 수많은 사람들 마음에 사랑의 불을 일으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게 되었고, 동시에 우리는 사랑의 불을 마음에 지니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불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불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예수님의 평화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불은 전쟁과 폭력, 복수와 살인으로 얼룩진 사랑없는 정의, 자비없는 희생일 뿐입니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등을 보고 있으면 무력과 무기로 상대방을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만이 어느 한쪽의 정의와 평화를 보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평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분열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자녀가 할 짓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는 세상을 위한 평화, 곧 하느님 모습대로 창조된 모든 사람의 평화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한닢까지 값지 않으면 그 평화를 이룰 수 없음을 압니다. 한쪽의 평화는 분열이며, 마더 데레사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 평화가 없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속해있음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람보는 평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의 손에 든 M60과 칼로는 복수와 파괴, 또 다른 증오를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콜베 신부는 평화를 가져옵니다. 그는 증오 대신 사랑을, 복수 대신 용서를 선택했고, 이는 생명을 살리고 사람들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폈습니다.
람보는 베트남 전쟁 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가 태워 죽인 적들이 그를 괴롭히고 그는 이것을 잊기 위해 술과 마약에 빠져들지도 모릅니다. 콜베 신부는 대신 자신을 온전히 태웠습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바쳐 영원히 죽지 않는 빛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이 된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9-12).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