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연중 제 17주일)
기도하지 않는 생명은 없다
(연중 제17주일)
2007년 사제서품식에서 저는 제대에 부복하여 세가지를 기도했습니다. 그 중 한가지는 암에 걸린 동기 바오로 수녀님을 살려주십사고 청한 것입니다.
수녀님과의 만남은 1999년 운명처럼 이루어졌습니다. 교구장 대주교님께서 대구대교구에 있는 모든 청원기 수도자들과 신학생들을 초대했는데 백명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같은 식탁 그것도 바로 옆에 앉게 된 수녀님이 같은 성당 중학교 동기였다는 사실을 아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후 도반이 된 수녀님은 2005년 종신서원을 했고, 2007년 사제서품을 앞두고 청천벽력같은 수녀님의 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뒤 2010년 3월 수녀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수녀님께 보낸 제 마지막 편지의 일부입니다.
(수녀님의 암 소식 이후)제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삼년간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원해서건 아니건 운명처럼 받아들인 시간동안 신학교에서 구년동안 공부하면서 배우지 못했던 것을 수녀님은 몸으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첫번째 수술과 6차에 걸친 항암치료, 수녀님은 훌륭히 싸웠고 무엇보다 정신이 밝고 건강했습니다. 그리고 1년 반 동안의 짧은 평화와 행복.
다시 찾아온 두번째 수술과 항암,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친구는 제게,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기를 원했는데 그 때문인지 하느님은 나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만들어 주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라고 묻고 싶지도 않고, 세상에서 “하느님의 진짜”가 되고 싶은데, “좀 많이 아프다.”라고 하셨지요...
지난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존경하던 저의 영성지도 신부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를 위로하면서 수녀님은 하느님께서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있고 그들 가운데에서 그들 자신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수녀님 역시 고통받는 자가 되었고,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셨습니다. '암이 나의 성소'라고 말씀하셨을 때 저는 너무 놀랐습니다. 아픈 소임을 받았기에 그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충실히 사는 것이 당신의 성소이고, 그 의미를 알아듣기에 살 힘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전화기 너머로 수녀님을 강복하면서 수녀님께서 바라신 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마지막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도록,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기를.”
힘들고 지리한 사개월을 영양제로만 버티셨습니다. 꿈에서도 링겔병을 꼽고 있게 되었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셨는지 빨리 성모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 달라고 저를 보채셨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못 견디겠다.’는 친구에게 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기도가 제 몫인데 전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호스피스 ‘무지개 병동’으로 옮기셨고, 그것은 제게 전화로 나눠야 할 마지막 인사의 때가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지난 삼년동안 바오로 수녀님은 제게 등불이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사제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던 저를 이끌어주는 밝은 빛이었습니다. 제 욕심에, 사람들에 힘들때에도 바오로 수녀님과 통화를 하거나 생각만해도, 무엇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고, 살아있음의 감사와 축복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걷는 동안 우리가 나눈 대화는 제 안에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라앉혔고, 죽음 너머를 희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이 사랑하고 기쁘게 사는데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오로 수녀를 살려달라’고 청했던 저의 기도를 하느님은 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존중’을 통해서 서로를 믿고 바라고 사랑할 수 있었기에 친구 바오로는 더 이상 제 밖의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상 바오로’라는 이름의 사제가 살아있는 한, 그 이름 한 가운데 ‘바오로’도 함께 머뭅니다. 하느님은 바오로 수녀님만이 아니라 당신을 통해 저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제게 영원히 살아있을 것입니다...(2010년 3월 첫날에)
저는 바오로 수녀님과의 삼년동안의 여정을 통해 기도란 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배우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제가 원하는대로 하느님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도록 제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제 시선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 더 정확하게는 수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바라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생명은 없습니다. 물고기도 기도하고 새도 기도하고 사람도 기도합니다. 생명의 신비 안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이 제 모습대로 기도합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없이 살 수 있는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화답송)
부르짖음 그 자체로 살아있는 기도가 됩니다. 살아있다면 기도해야 하고 기도한다면 믿고 희망해야 합니다. 평생을 하느님을 찾아 구도자의 길을 걸었던 트라피스트 수사 토마스 머튼의 기도처럼 말입니다.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없습니다. 그 길이 어디서 끝날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정말 제 자신을 알 수 없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제가 그리 한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그 갈망이 실제로 주님을 기쁘게 한다는 걸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그 갈망을 갖길 희망합니다. 그 갈망에서 벗어나서 어떤 일도 하지 않기를 스스로 희망합니다. 그리할 때, 제 비록 아무 것도 알지 못해도, 주님께서 옳은 길로 이끄실 것을 압니다.
그러니 죽음의 어둠 속에서 갈 곳을 잃어 헤맬 지라도 주님을 항상 신뢰하렵니다. 두려워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서 늘 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험에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실테니까요.(토마스 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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