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발에 입맞추시는 하느님 (사순제3주일)

                                                                내 발에 입맞추는 하느님

(사순제3주일)

제가 미국에서 한 첫번째 실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2003년 미국에 온지 약 한달이 지났을 때 본당실습으로 2주간 미국 사제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 본당신부님께서 저를 픽업해서 가는 길에 신부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신부님께서 사제관에 성질이 고약한 개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부님, 걱정마세요. 우리는 개를 먹습니다(Father, don't worry. We eat a dog)."

지금 생각하면 상대방의 생각이나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어처구니 없는 대답이었기에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실은 제가 개고기를 처음 먹은 것은 신학교에 입학하고 였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부활대축일이나 주교님 방문 등과 같은 특별한 날에는 개고기를 먹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 선교를 온 프랑스 선교사들이 신학생들을 양성하면서 이들의 영양이 부족해지자 개를 잡아 먹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사람이 개를 잡아 먹었다는 사실보다 제게 더 의미있게 다가온 것은 선교사들이 자신의 관습을 떠나 주어진 처지에서 다르게 행동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설혹 그것이 평생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삼년째 열매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도대체 왜 그럴까요?

'멍청함이란 같은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Stupidity is doing the same thing over and over again and expecting different results)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무화과나무는 삼년째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내게 바라시는 삶을 알면서도 살지 못한다면 생각을 바꾸고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부부사이에 어떤 주제에 있어서 늘 다툼이 있다면, 그 사람이 너무 미워 계속해서 화가 난다면, 자녀의 이런 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열매맺지 못하는 상대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부인이 병원에 와서 의사와 상담하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의사가 진찰을 마치고 처방을 하려하자 부인이 말합니다. "선생님, 처방은 남편에게 해 주세요. 아픈 것은 남편입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1코린 10,12).

'나는 괜찮다', '나는 틀릴 수 없다', '네가 문제다', '그 일만 아니면'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과 약점만 보이고 그들의 못난 점을 늘 탓하고 투덜거립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 낮춘다면 넘어질 일이 있을까요? 고개를 숙이는 것만이 아니라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까지 숙인다면 절대 넘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줄 것입니다.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내전 중인 아프리카 남수단 대표들을 모아 평화를 강조하시며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각 사람의 신발에 입을 맞추셨습니다. 여든 두살에 거동이 불편하신 교황님께서는 혼자 일어나기도 힘들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발에 입을 맞추셨습니다.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오늘 주님께서 모세에게 일러주신 그분의 이름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에 존재 그 자체이심을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씀에서 인간 앞에 고개 숙이고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추는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삶 속에서 같은 고통을 겪고 인간을 위로하시는 하느님은 '나는 있는 나'이면서 동시에 나는 '너를 위해' 있는 나임을 선포하십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 말입니다.

그분은 여기 있는 요셉의 하느님, 루시아의 하느님, 데레사의 하느님이시며 우리 발에 입을 맞추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있는 분이시며 이것이 영원히 불릴 그분의 이름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분의 자비 때문입니다.

오늘 내 발에 입을 맞추시는 하느님 앞에서 열매맺지 못하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 다가오는 시간에 나의 생각과 행동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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