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원수인가? ( 연중 제 7주일 )
누가 원수인가
( 연중제7주일 )
누구나 원수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원수도 아니고 웬수죠.
웬수를 떠올려 보십시오.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나죠?
원수는 누구입니까? 나에게 해를 입히고 생각하면 화가 나고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모멸감,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원수는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원수가 아닙니다. 너무 먼 사람은 원수가 되기 어렵습니다. 원수는 가까이 있는 남편, 자식, 형제자매, 친구, 직장 상사입니다.
두번째로 원수는 한때는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너무 가까워지다보니 기대와 배신감이 커서, 혹은 다른 이해관계가 때문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수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고 멀리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자주 보게 되고 마음 한편에서는 오해를 풀고 화해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예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말로 저주하고, 행동으로 학대하는 원수를 위해서 잘해주고 축복하며 기도한다는 것은 실천 불가능한 말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원수와 함께 살아갑니다. 원수 때문에 감정이 북받쳐 오르고 화가 치밀어 혈압이 올라가도 원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원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내가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도 누군가에게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마음으로 미워하고, 뒷담화로 저주하고, 말로 행동으로 학대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과 말과 행동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럼, 너는?'하고 물으신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당당하게 '저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 자비로 살아갑니다. 우리 역시 이웃에게, 하느님에게 죄를 저질러 원수가 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원수같은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고 용서해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
우리가 남을 대하는 방식이 범죄 조직이나 카르텔과 다른 이유는 우리가 인간적인 관점이나 이익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자비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고(공자), 나를 위하는만큼 남을 위하는 신앙인(이슬람)이 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황금율(Golden Rule)입니다.
우리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저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서서 받아주고 용서하고 사랑까지 하라는 적극적인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말입니다.
결국 이는 내가 심판받지 않고 단죄받지 않고 용서받았음을 아는만큼 행할 수 있습니다. 내가 체험한 하느님 자비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는' 하느님 자비의 체험만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누군가에게 원수같은 나만이 아니라 원수같은 이웃을 위한 것이 된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자비를 잊지 말고 원수를 떠올리며 그를 위해 기도하며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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