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3주일 강론

 사제 피정 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들이 모여 같이 기도하고, 성시간을 가지고, 성체강복을 매일 하였습니다. 함께 미사 드리고 강의를 듣고 가끔은 서로 나누기도 하였습니다.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느덧 6월의 마지막 날이고 주일입니다. 2024년 상반기가 끝나는 시점에 있습니다. 하반기에도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연중 13주일 복음 역시 마르코 복음을 읽으면서, 두 명의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난주 강론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써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권능을 선포하셨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 주셨습니다. , 하느님은 전능하시다는 것, 전능하신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여러 행적과 기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적들은 하느님 나라를 가리키는 표징징표 상징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봐도 탁월한 정신을 지니셨고 더군다나 하느님의 힘, 기운인 성령을 듬뿍 받으신 까닭에 영험한 분, 영검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대하는 사람들은 우선 마음에 크나큰 위안을 받았고, 그 결과 몸의 병고까지 낮게 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염력이 환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구마 기적과 치유 기적은 일종의 정신력 요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인병을 12년 동안이나 앓고 있는 어느 여인과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만납니다. 부인병을 앓고 있는 여인에게는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고 회당장의 딸에게서는 부활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어느 사람에게 더 동정이 가십니까? 부인병을 앓고 있는 여인에게 더 동정이 가십니까 아니면 죽음에서 부활한 회당장의 딸에게 더 동정이 가십니까? 이 두 사람에게는 엄청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습니다. 부인병을 앓는 이 여인에게 주목하여, 그 사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자매님들이 더 쉽게 이 여인에게 공감을 가질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수많은 사람 속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상황이고, 이제는 마지막 선택, 이 여인만이 할 수 있는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그저 예수님께 대한 단순한 믿음, 저분의 옷이라도 만져봐야겠다는 그 결단,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마지막이라는 결의에 찬 선택입니다. 이제 더는 의지할 곳이 없는 간절함 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 옷에 손을 살짝 만지고 난 후의 모습, 예수님이 돌아보시니, “두려워 떨면서 나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이 단순한 믿음에서 나오는 고백,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을 맞이한 회당장 야이로의 딸, 곧 죽게 되었으니 잠깐만이라고 오셔서 손 한번 얹어주시기를 청하는 아버지! 부인병의 여인과 이 회당장의 마음은 분명히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본인이고 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딸아이라는 것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두 사람의 감정은 간절함과 절박함 이었습니다.

 

이민 생활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간절함과 절박함을 겪으셨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가 한 번쯤은 여인의 마음과 아버지의 마음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겪을지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오십시오. 주님과 멀어져 있는 분들은 분명히 이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두 가지를 들고 주님 앞으로 오시라고 전해주십시오.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은 하느님 앞에 갈 때까지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삶을 긴장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편으로 우리 믿는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도구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우리 본당 공동체에 대한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살기에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때로는 고질병에서 치유된 여인의 마음을 가질수 있고 죽음에서 부활한 한 소녀의 체험과 느낌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간절함과 절박함에서 주님을 만나는 2024년 하반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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