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
어느덧 5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아마도 5월을 모든 교우가 바쁘게 보낸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5월 마무리 잘하시고 건강관리 잘하셔서 건강하게 남은 한 주 보냈으면 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로 부활 시기를 마치고 다시 예수님 공생활의 말씀과 행적을 묵상하는 연중 시기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주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잊어버리지 마시고 잘 기억하셔서 주신 은사를 더욱 발전시켜 나가면 좋겠습니다. 저는 공동체 전체에 주시기를 청한 일치의 은사를 잘 간직하고 계속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부활 시기 후 돌아오는 첫 주일을 교회는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냅니다. 부활 대축일,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이 사건 중심의 대축일이라면, 오늘 대축일은 사건 중심이 아닌 소위 말해서 ‘이념 축일’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사건이 아니나 성서와 전승에 의한 생각과 믿음을 통해 우리의 신앙으로 수용해야 하는 축일입니다.
신학적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찰해보면,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서 존재하는 하느님 신비를 지칭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입니다. 하느님 한 본체 안에 세 위격(persona)이 존재한다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매일 기도 시작할 때나 마치면서 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하는 손짓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서는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명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바로 우리가 매일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5장에서 17장의 말씀에서도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명시하시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와 아들과 보호자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되면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그 유명한 일화가 떠오릅니다. 성인이 삼위일체 신비를 묵상하고 글로 쓰면서 너무 머리가 아파 해변을 거닐 때, 한 어린아이가 모래사장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조가비로 바닷물을 퍼 담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 연유를 물으니 거기에 바닷물을 모두 담기 위해서라고 아이가 답합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 줄 아느냐고 성인이 물으니, 아이는 당신은 작은 머리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것이 얼마나 더 어리석은 일이냐고 반문하며 천사로 변해 떠나갔다고 합니다.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는 끝이 없으며 인간의 이성으로는 모두 수용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관한 것도 그렇습니다. 지식과 신앙의 차이는 지식은 합리성과 논리에 의해 설명되며 동시에 이해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해 이전에 관계에 의해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각자가 느끼고 체험하는 하느님은 분명히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 하느님을 우리는 서서히 알아가고, 그 하느님과의 관계(relationship)가 서서히 돈독해집니다. 그 관계의 출발은 사랑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도 명예나 물질로 관계를 시작하는 예도 있지만,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맺어 온 사람들을 떠 올려 보십시오. 좋은 관계를 오랫동안 맺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서로에 관한 관심과 배려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는 매일 고백하고 기도하며 필요한 은총을 청합니다. 기도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녹아서 스며들 때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 안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 역시 스며들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에 떠올려야 하는 묵상 주제는 교회가 이 천 년 이상 외치고 있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였으면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인간을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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