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대축일 강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인사를 모든 교우에게 전합니다. 부활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항상 봄에 이루어 집니다. 성당 정원에 심은 꽃나무에서 꽃망울이 올라오고 나무에서 새싹이 만발하고 있는 봄을 봅니다. 모두가 이제는 완연한 봄이구나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봄과 함께 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교우들 모든 분께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간의 나약함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을 재촉하는 미움과 분노, 상처, 원한, 분열 등을 모두 없애주셨으면 합니다. 특별히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교우들에게 부활의 치유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서기 3047일 오후 3시에 예루살렘 성 밖 골고타라고 하는 언덕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이라는 죄목으로, 로마 제국에게는 국가전복죄라는 죄목으로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내리는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던 제자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어머니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만이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머니 마리아 외에는 복음서에 겨우 한두 줄 나왔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의 죽음을 끝까지 함께하는 것은, 모성애에 따른 당연한 처사이지만, 다른 여인들은 왜 예수님의 죽음에 끝까지 함께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예수님께서 가끔 말씀하셨던 부활에 관한 말씀을 새겨듣고 그 말씀을 굳건히 믿었기 때문일까요? 분명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누군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살았고 그분 곁에 있고 싶은 마음이 강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 나왔던 마리아 막달레나를 한번 만나보도록 합시다. 그녀는 예수님 공생활에서 그렇게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은 못됩니다. 매춘부였다는 전설이 있는 이 여자는 자신한테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예수께 감사하여 예수를 믿고 따랐는데 막달레나는 갈바리아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그 곁에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며(마태 27:56),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부활날 아침 무덤에 갔던 세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마르 15:47).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요한 20:14-18). 오늘 우리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한번 되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최첨단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어쩌면 흔히 말하는 인공지능(AI)에게 자신이 부활할 수 있는지물어보는 것이 더욱 익숙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제일 쉽게 와 닿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이라는 단어는 허무맹랑한 단어일 것입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한 번이라도 생각하였다면 지금쯤은 가톨릭교회에 있든지 아니면 개신교에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 루르드 성지 근처에 몽토방(Montauban)이라는 작은 동네에 파리외방전교회 은퇴 신부님들아 사시는 요양원겸 병원이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 다 있을 것입니다. 우리 볼티모에서 있고, 한국에도 있습니다. 사실 말이 요양원이지 죽을 날만 기다리는 호스피스(Hospice) 병동입니다. 그 동네를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선배 신부님께서 과거 신학교에서 교수로 계셨던 신부님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거의 80대에서 90대 신부님들이시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불러주시기만을 기쁘게 기다리는 신부님들이었습니다. 감동적인 것은 그분들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는 것입니다. 병실에 계시는 은사 신부님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기쁘게 죽기만을 기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그 신부님들이 선교지에서 평생 가르치고 몸소 보여주었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병실에 계시던 은사 신부님은 찾아갔던 선배 신부님에게 부활로 갈 준비를 다 마쳤다고 하시면서 자신이 더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부활은 눈 속임도 아니고 마술도 아니고 실제 사건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살고있습니다. 그 부활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에, 현재의 고통도 아픔도 상처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부활을 축하드리고 부활의 삶을 씩씩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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