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강론

 8월의 첫 주일입니다. 8월도 우리 교우들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기도합니다. 하시는 일 또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잘 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많은 지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첫째는 자선을 베풀어라는 말씀을 하시고, 두 번째는 준비하고 살기를 부탁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첫 번째 말씀은 지난 주 복음과 연관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탐욕을 경계하라 지난주 말씀은 탐욕을 경계하면서 지상의 재물을 혼자 가지고 즐기지 말고 이웃에게 베풂으로써, 그 베풂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자선(alms)으로 연결되기를 지시하십니다. 첫 번째의 말씀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은 준비된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세하게 예를 들어가면서 길게 말씀하십니다. 길게 장황하게 말씀하는 것에서 말씀의 중요성을 알 것 같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난주 세분의 교우가 하느님 곁으로 가신 일이 생각이 났고 나름대로 묵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세분 중에서 두 분은 자주 뵈었던 분들이고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해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물론, 저 보다 본당의 교우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에 보아왔던 저에게는 모범이 되는 분들로 다가왔습니다. 임종을 앞둔 시점에서 마지막 전대사(全大赦, Plenary indulgence)를 베풀 때, 그분들의 얼굴에서 얼마나 잘 준비하고 살아왔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하느님 만날 준비가 되었나요?하고 물었을 때, 당당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죽음을 잘 준비하여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죽음을 잘 준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죽음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크고, 무엇인가 화려한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이 그저 주어진 삶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역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의 역할, 주인이 자기의 재산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종의 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 줍니다. 준비하는 삶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됩니까? 2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믿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하신 말씀의 뿌리는 바로 믿음입니다. 막연한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그 믿음이 우리 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준비하는 삶이 됩니다. 그 믿음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삶을 바치는 것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이 세상의 삶에서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이 살아온 삶을 뒤돌아 보았을 때, 누구나 후회하고 아쉬워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부끄러웠던 점들도 많고 잘못한 것들도 많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만큼은 충실히 지켜왔다고 생각한다면, 부족했던 많은 것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준비를 잘 한다는 것은 믿음을 충실히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주는 수단이기에 우리는 우리 삶을 충실히 돌아볼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분명히 우리를 준비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 믿음으로, 그 신앙으로 우리는 충실한 종의 모습을 가지고 살고 것이고, 그 모습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입니다.

 

2독서 말씀을 깊이 있게 새겨보았으면 합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서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우리 더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은 이 말씀을 체험하였고 하늘나라에서 즐거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약한 믿음을 좀 더 강하게 해 주시기를 청하며 현실의 삶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한 주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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