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 강론
이제 3월도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에는 4월에 뵙습니다. 화창한 봄 날씨를 만끽할수 있습니다. 지난주 버지니아 성당에 고해성사를 신자들에게 베풀었습니다. 오후, 저녁에 손님신부님들을 초대하여 많은 교우분이 오셔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형제, 자매들과 화해하고 돌아갔습니다. 우리 교우들도 부지런히 오셔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식구들, 이웃들과 화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순 4주일 복음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과거에는 이 복음을 ‘돌아온 탕자(returned a prodigal son)’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새 번역 성경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the parable of the lost son)’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 말씀은 오직 루까 복음에만 나오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많은 화가는 자기들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모니터에 나오는 성화를 유명한 렘브란트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서화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렘브란트의 작품으로 렘브란트 말년에 제작된 작품입니다. 일설에는 렘브란트는 그림 속에 자신을 그려놓기도 하고 성경의 사건 속에 대입시키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사랑과 포용력을 통해 깊은 종교적 체험을 표현한 걸작으로, 렘브란트가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자신의 고독한 심정을 성경 속 사건을 토대로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조금 더 설명해 드리면,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사한 지 3년 정도 지난 1636년에 ‘유산을 탕진하는 탕자’를 1669년에는 ‘돌아온 탕자’를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자신이 탕자가 되어 인생을 고백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첫째 부인 사스키아와 외아들 티투스의 죽음 외에 여러 번의 큰 불행을 겪고 재산까지 탕진해 절망에 빠져 있었을 때, 자신을 탕자로 묘사해 자신이 믿고 있는 하느님만이 끝까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작품에 담아냈으며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부드럽게 두손을 얹고 용서하는 자비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리적 통찰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으로써의 의미를 해석하였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판넨베그르는 오늘 복음이 신약성서 전체를 대표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복음으로 예수님은 신약성서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이 복음에서 주인공은 과연 누구입니까? 돌아온 아들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입니까? 단연코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 첫째 아들은 더욱 아니요, 그렇다고 돌아와서 용서해달라고 매달리는 둘째 아들도 아닙니다. 둘째 아들을 따뜻이 맞아들이는 아버지요, 화가 나서 아버지를 원망하는 첫째 아들을 달래주는 바로 그 아버지가 단연코 비유의 주인공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이시고, 교회의 교부들이 많이 설명한 것으로, 첫째 아들은 이스라엘 민족이고 둘째 아들은 이방인임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지난 주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회개를 강요하다시피 하셨습니다. 회개를 거절하면 죽음이 다가옴을 피력하셨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섬뜩한 느낌마저 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지난주와는 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의 결과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돌아갑시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를 따지지 말고, 회개할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거나 큰 소리로 말하지 말고, 나 자신이 먼저 하느님께로 돌아갑시다.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따지지도 묻지도 않습니다. 조용하게 나의 삶을 그분께 바쳐드리고 자비하심을 간청하도록 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세례를 받은 이상, 그분께로 더 가까이 다가갑시다. 스스로 그분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체험하도록 자신을 낮추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자신을 더욱 깊이 성찰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하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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