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1주일 강론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가을의 정점을 지나는 시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서서히 겨울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환절기에 건강관리 잘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전례력도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으로 향해 가고 있습니다. 113주 동안은 교회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주간입니다. 또한 11월은 위령성월입니다. 대림절을 앞두고 우리 삶을 돌아보는 11월이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는 11월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 12장으로 건너뛰어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아는 복음 말씀입니다. 오늘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 절의 말씀도 덧붙여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앞 절의 말씀은 예수님과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해서 논쟁을 합니다.

 

참고로, 사두가이는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때로는 바리사이와 함께 소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마태3,7: 16,11012: 22,34). 이 사두가이는 이스라엘의 다른 집단(핫시딤, 엣세느, 바리사이)들과는 반대로 정치적 여당 성향이 뚜렷하였습니다. 명사와 부자, 대제관 가족과 귀족들이 서로 전혀 동질성이 없으면서도 이에 속하였습니다. 유대 국가의 마지막 70년간 정규적으로 권력의 최고 대표자인 현직 대제관이 그들 가운데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의 신학 사상은 모든 혁신을 거부하고 되도록 오경만을 구속력이 있다고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적인 단체였습니다. “조상전통이라는 바리사이 해석전통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묵시문학 종말론적 희망에도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사후에 이어지는 삶도 죽은이들의 부활도 없고, 구원은 역사 안에서 실현된다고, 천사의 존재도 거부하였습니다. 이들은 옛 상태의 구약성서와 완전히 일치해 있었습니다.

 

이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일곱 형제와 살았던 제일 큰 형수 이야기를 하면서 사후 세계에 대해서 부활하면 누구와 살겠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장가드는 일이 없는 세상을 임을 밝히시면서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는 장면이 오늘 복음 앞 절에 나옵니다. 이 토론을 지켜보던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제일 첫째가(The great commandment)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신명기 64절을 인용하시고, 그 다음으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계명을 하나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주십니다. 오늘 율법 학자와의 대화는 이전의 논쟁적인 대화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줍니다. 질문하는 율법 학자의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 학자의 대답 훌륭하십니다. 스승님!.....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율법 학자의 대답에서 예수님은 이제까지 어느 사람에게도 말씀하신 적이 없는 엄청난 칭찬을 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이 말씀을 압축하면, 그 율법 학자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의 단계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은 되지 않았음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율법 학자를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정신으로 율법 학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 당당히 아뢸 수 있었습니다. 이 율법 학자가 부럽다는 묵상을 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마르코 복음에서는 처음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핵심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중요한 삶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신심 깊은 유대인들은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신명기 64절을 양피지(parchment)에 기록하여 작은 상자에 넣어서 집에 걸어두고 아침, 저녁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오늘 말씀하신 사랑의 이중 계명이 유대인들의 신명기 64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누구나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웃은 하느님 같이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이웃은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는 온갖 찬사를 다 보내면서 이웃은 눈에 보이면서 동시에 장점 보다는 단점이 눈에 먼저 들어오기 때문에, 하느님같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있는 그대로 보고 보고 있는 것을 사랑으로 감싸주고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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