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강론

 8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3일 후면 9월로 들어갑니다. 2021년도 이제는 4개월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4개월이나 남았다는 분도 계실 것이고 4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조바심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막상 개인 앞에 닥쳐오면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 법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신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계획적으로 시간을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연중 22주일은 이제 일상의 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지난 5주간 우리는 생명의 빵에 대해서 오랫동안 들었고 묵상했습니다. 오늘은 생명의 빵 이전의 복음으로 돌아와서 마르코 복음의 7장을 읽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 제자들의 행위를 보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면서 한판 붙으려고 찾아옵니다. 여기서 잠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에 대해서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바리사이(Φαρισαος, pharisees)’라는 이름은 분리된 자들, 선별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도시와 마을에 머물고 성전에도 머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관심사는 자신들과 백성들의 성화와 정결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전 밖에서도 제례적 정결 법규를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제례적 정결 규정을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례적 정결 규정 준수를 통해 일상생활의 의례화와 일상생활의 성화를 실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결국, 율법 조항에 목숨을 걸고 산다고 보시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모세가 전해준 십계명을 시간이 흐르면서 십계명에서 파생되어 나온 조항들이 하나 하나 생기게 되었으며, 이것을 율법이라 불렀습니다. 나아가서, 율법 외에도 전통이라는 것이 생겼으며, 이것을 조상전통이라고 불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들과 함께 복음서에 단골로 나오는 명칭입니다. 어떤 성서학자는 율사들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바리사의 모습은 완성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 학자들은 법전이자 종교서인 성서의 이중 기능에 따라 신학적 가르침을 전달하고 법적 발언군을 행사하게 되어 있던 한 직업상의 신분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신학 학교를 세워 학생들ㅇ르 자지네와 같은 사람으로 양성했던 인물들입니다. 이 율법 학자들이야 말로 회당에서 가장 적격인 안식일 설교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율법을 어기고 조상 전통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위에 항의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은 이사야서 2913절을 인용하시면서 그들의 위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두 집단이 가르치는 것과 그들의 삶이 다름을 비판하십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 안에서 외적인 위생보다는 내적인 위생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하고 소중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 더럽힌다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은 위생은 아주 간단하게 우리가 습관만 가지게 되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은 한 순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들을 나열해 주셨는데 자신과 가장 친하고 가장 나에게서 잘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이러한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울수 없습니다. 누구나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이 수시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우리 각자를 제일 많이 괴롭히고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하신 것들 중에서 우리 안에서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는 삶을 잘 살고 있습니다. 적으면 적을수록 다른 좋은 것들이 그 자리를 채울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 한계를 지니고 인간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과 우리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들을 한번 추슬러보세요. 분명히 나와 가장 친하고 수시로 작용하는 것이 있습니다. 왜 이러한 것이 나를 괴롭히는지 한번 자신을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이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더럽혀지기보다는 깨끗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좋은 습관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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