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연중 제 32 주일

  완연한 가을이지만 날씨가 꽤 덥습니다 . 일교차가 크기 때문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볼티모 교구 사제 연수회 (Convocation) 에 갔다 왔습니다 . 140 명 가까운 신부님들이 세 분의 주교님과 함께 3 박 4 일의 일정을 함께 하였습니다 . 마지막 저녁 식사 시간에는 잠시 일어나서 한국순교자 성당의 건축과 저의 임기가 내년 1 월까지라고 공지하기도 하였습니다 . 한국순교자 성당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   연중 32 주일에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 하나는 율법 학자들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고 , 다른 하나는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 이스라엘 남자들은 누구나 축일에 두루마기 비슷한 예복을 입었습니다 . 특히 율법 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의 예복은 한결 더 길었다고 합니다 . 또한 남자들은 탈출 13,1-6. 신명 6,4-9. 13,-21 에 나오는 내용을 적어 작은 성냥갑 비슷한 것에 넣어 그것을 이마와 왼팔 윗부분에 묶고 다녔습니다 . 소위 성구갑 입니다 . 그리고 겉옷 자락 네 곳에는 흰 실과 푸른 실을 꼬아 만든 술을 달고 다녔는데 소위 “ 옷단의 술 ” 이라고 불렀습니다 . 예수님 시대에 율법 학자들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일손을 멈추고 선생님 ( 랍비 ) 또는 “ 아버님 ” 이라 부르면 인사하였다고 합니다 . 또한 지역의 유지이기 때문에 어느 모임에서나 윗자리를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 예수님은 이런 율법 학자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그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 예수님께서 오늘날에 계셨으면 분명히 교우들에게 “ 사제들을 조심하여라 . 그들은 수단이나 로만 카라를 하고서는 어디를 가든지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 어느 모임에서든지 높은 자리를 ,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스스로 찾아서 앉으려고 한다 .” 또한 “ 혼자서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교우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기도를 길게 한다 .”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 강

연중 제 31주일 강론

  11 월의 첫 주일입니다 . 우리는 11 월 첫날을 하늘에 계시는 모든 성인을 공경하는 대축일을 지냈고 그다음 날은 죽은 모든 영혼을 위한 위령의 날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 모든 성인이 우리 본당과 교우들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간청해 봅니다 . 교우들께서도 11 월 위령의 달 동안 , 먼저 가신 부모 , 형제 , 친지들 , 본당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시다가 가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부탁합니다 . 겨울의 문턱으로 들어가는 11 월에도 교우분들이 하느님 사랑 안에서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기도합니다 .   연중 31 주일에 다가오는 예수님 말씀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친근한 말씀입니다 .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예수님과 어느 율법 학자의 대담내용입니다 . 잘 아시는 것처럼 ,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지켜야 할 계명은 10 개입니다 . 그리스도교의 십계명은 유대인들이 받은 십계명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10 개입니다 . 유대인들은 이 십계명을 토대로 613 개 조항의 율법을 만들었습니다 . 이 가운데 248 개 조항은 명령이고 365 개 조항은 금지조항입니다 .   신명기 6 장 5 절에 나오는 ‘ 들어라 . 이스라엘아 ( 셔마 )’ 는 유대인들이 아침 , 저녁으로 외우던 기도문입니다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신명기 인용문은 유대인들의 ‘ 셔마 ’ 라는 기도와는 조금 다릅니다 . 아마도 마르코 복음사가가 조금 수정하였다고 합니다 . 마르코가 오늘 복음 말씀에서 나오는 예수님과 율법 학자의 대담은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꾸며서 전한 것이라는 설이 강하다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 특별히 32 절에 나오는 “‘ 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 하시니 ,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 .” 라는 대목에서는 유대인들에게는 생소한 문장입니다 . 유대인들은 당연히 유일하신 하느님을 믿지만 , 초대 교회에서는 이스라엘을 벗어난 세계는 모두 다신교이기 때문에 , 이 다신교와 대결하던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일신 강조가 너무

연중 제 30주일 강론

  10 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 우리 교우분들 남은 10 월 잘 보내시고 모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주에는 손님 신부님 두 분과 뜻하지 않게 군종 신부님 두 분이 오셨습니다 . 교중 미사에는 손님 신부님과 군종 신부님 두 분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 함께한 신부님들 위에서 기도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연중 제 30 주일에 들어왔습니다 . 이제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외침에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장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평생의 소원이었던 볼 수 있게 치유해 주십니다 . 소경이며 거지로 살아 온 바르티매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로 주시면서 ,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십니다 .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성경에서 말하는 “ 자비 (Mercy)” 는 과연 무엇입니까 ? ‘ 자비 ’ 라는 단어의 현대적 용법에 의하면 동정심 내지는 용서와 동일시 되고 있습니다 . 이 자비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에 있어서는 동정심과 충실성이라는 두 가지 사상의 접합점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 자비라는 단어의 히브리어의 뜻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본능적 애착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이 히브리어의 자비 (rahamin) 는 어머니의 품 , 아버지와 형제의 심장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 그리스어의 ‘ 자비 (eleos)’ 라는 단어는 두 사람을 결합시켜 주는 관계를 의미하며 또한 충실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 자비는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그 견고한 바탕을 가지게 됩니다 . 즉 , 자비는 그 본질과 목표에 있어 본능적 선이 아니라 , 오히려 의식적 의지에서 나오는 실천적 선입니다 . 이것은 내적인 의무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성에서 나오는 책임있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들의 현대적 번역들은 “ 자비 ” 에서부터 “ 사랑 ” 에

연중 제 29주일 강론

  완연한 가을입니다 . 한국에서 오신 신부님들과 여행 중에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가을의 절정으로 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고 감탄하기도 하였습니다 . 한국보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면서 좋아하시는 신부님들 보면서 볼티모 성당으로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였습니다 .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담형식 말씀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 사도 중에서 베드로 사도와 같이 사도단의 기둥 역할을 하는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 베드로와 더불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형제 제자들입니다 . 또한 이들은 스승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한 사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 야고보 사도는 초대 예루살렘의 주교였습니다 .   그런데 이 형제가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께서 “ 영광을 받으실 때 ( 영광스럽게 될 때 )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 라고 청합니다 . 재미있는 것은 ,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로서 다시 오실 때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8,38. 13,26. 14,62). 그러나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다닐 때 그분을 종말에 오실 분이라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짐작하고 그분이 지상에 메시아 왕국을 세울 날을 은근히 기다렸습니다 .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왕국을 세우시면 당연히 제자들에게 높은 자리를 하나씩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지난주일 복음 마지막 단락에 베드로 사도는 “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 베드로 사도의 이 표현은 은근히 무엇인가를 바라는 수고의 보상을 재촉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 아닌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강하게 바라는 현실의 우리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결국 사도들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